<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멈춰 서서 듣는 법을 배우는 시간

정우선

책을 펼치기 전, 나는 제목에서부터 잠시 멈춰있어야 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미 내가 공부해왔던, 그리고 잊지 않고자 했던 많은 슬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빗속에서 이미 젖어버린 우산을 쓰고 다시 그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마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저자인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에서 문학과 시, 노래와 영화, 그리고 우리가 애써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사회적 사건들을 조심스레 꺼내어 놓는다. 그가 하는 일은 단순하다. 타인의 슬픔 앞에 가만히 멈춰 서는 것. 그리고 그 곁에서 오래 머무는 것.

책 속에서 내가 가장 오래 붙잡은 문장은 이것이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고통을 이해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깊이를 다 알 수 없다. 신형철은 그 한계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여 애쓰는 일을 멈추지 말자고 말한다. 그 ‘실패를 각오한 공부’야 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슬픔을 왜 ‘공부’라고 표현했을까?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려는 일은 단번에 끝나는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과 성찰이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한 번의 독서가 평생의 지혜를 주지 않듯 한 번의 공감이 타인의 모든 상처를 품을 수는 없다.

이 책은 다섯 개의 주제로 슬픔에 관해 이야기한다. 첫 장에서는 슬픔과 상실에 대한 사유가, 중반에는 문학 속 인물들과 시인의 목소리가, 그리고 후반에는 세월호와 천안함 같은 현실의 사건들이 등장한다. 이 흐름 속에서 저자는 사회적 약자와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여성, 이주민, 성 소수자, 장애인 등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다. 그들이라고 칭하기에는 나일 수도 있는 그리고 ‘나’인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쉽게 묻히거나 ‘잊어야 한다’는 말로 덮인다.

“그들의 시간은 멈췄지만, 우리는 계속 걷는다. 그래서 우리의 걸음은 그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이 문장에서는 유독 오랫동안 활동해온 대구여성인권센터 활동가들의 얼굴이 스쳤다. 여성 인권 현장에서 피해자들이 말할 준비도 끝내기 전에 세상이 ‘이제 그만’이라고 속삭이던 순간에도 그 자리에 멈춰서서 이야기를 듣고 함께 소리쳐주던 이들.

세상의 무심한 속삭임이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는지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성폭행 피해자가 법정에서 2차 가해를 견디는 일, 노동자가 차별과 착취 속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현실, 성소수자가 존재 자체를 ‘논쟁거리’로 취급당하는 사회. 그 모든 장면에서 ‘계속 걷는 우리’의 발걸음이 누군가에게 고통이 된다.

책을 읽으며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듣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슬픔을 설명하려 들지 않고, 대신 그 슬픔이 있는 자리에서 오래 머무른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만하게 ‘이해했다’고 말하는 대신, ‘그 한계 앞에서 계속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방식과 많이 닮아있다. 연대는 거창한 구호나 급진적인 행동만이 아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그 기억을 잊지 않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어 함께 말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바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아닐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나에게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었다. 이 책은 ‘들어야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의 손에 건넨다. 타인의 슬픔을 끝내 다 알 수 없더라도, 그 앞에 멈춰 서서 듣고, 바라보고, 배우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여성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이름들일 수도 있으며,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이들의 역사일 수도 있다. 저자의 시선은 그것들을 한 자리에 앉혀 놓고 우리가 천천히 마주할 수 있도록 이끈다.

여름휴가 기간의 막바지 조금 더 밝고 신나는 책을 소개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그것을 외면한 적이 있는 사람, 혹은 너무 큰 슬픔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사람, 그리고 그 침묵이 가슴 깊숙이 남아있는 사람에게. 이 책이 그 침묵의 자리에서 어떻게 머무를 수 있는지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늘어나는 세상이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이 공부는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끝나지 않아야만 한다. 이 끝없는 시도가 우리를 좀 더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견디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내 안에 오래 살게 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를 지켜주기를 기도하며 말이다.

추신: <알통>이 발행되는 8월 29일은 저의 생일입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우리에게 슬픔을 이해하는 힘을 주듯, 삶에서 큰 힘이 되는 것은 기쁨을 함께 나누고 기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축하를 부탁드리며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